어느 날 세계가 망했다. 세계가 망했다고 해도 될까. 사실 세계는 어제와 그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나 말고, 남들에게. 누워있는 내 옆에서 수 대의 자전거가 스쳐간다. 그들이 뚝뚝 떨어트리는 땀방울이 내 위에 쌓인다. 숨을 막는다. 세계는 또 멸망하고 나는 여전히 어항 안에 갇혔다. 어항을 채운 건 물은 아니고 그들이 흘린 땀이다. 눈물...
어느 쪽이냐 하면 킨조 신고는 자전거 탈 때의 승부를 제외하면 욕심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견실한 회사에 들어간지도 어느덧 10년 차를 앞두고 있어 제법 모아둔 돈은 있었지만, 주거지에도 그다지 집착하지 않아서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대학 때 자취하던 도 외곽의 엘레베이터도 없는 복도식 아파트 3층의 1K에서 바로 위층의 1LDK로 옮겼을 뿐이었다. 성실했기...
일본의 입학식은 4월이다. 꼭 같은 곳에서 맞춘 것처럼 같은 색과 같은 핏과 같은 재질의 수트를 입고―아마 정말 같은 곳에서 맞췄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수천 명의 학생들이 같은 곳을 향한다. 드넓은 강당에는 발디딜 곳 없이 사람들이 빼곡히 차 있고 단상 위에는 오늘 이후 졸업할 때까지 얼굴 한 번 제대로 볼 일 없을 교원들이 또 한 무리 운집해있다. 이시...
4. 눈 감기 전 나는 서른다섯살의 이탈리아에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지 않냐는 물음에 오늘은 걸어가겠다고 대답하고는 구두에 발을 쑤셔넣었다. 갈색의 로퍼가 낯설다. 다리를 감싸고 있는 노란 체크무늬의 바지는 원래 이렇게 원단이 형편 없었나 싶게 얄팍하고,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도무지 입을 수 없어 팔을 꿰는 대신 어깨에 걸치는 것으로 타협을 본 녹색의...
0. 네가 처음 죽었다. 너의 나이 서른네살 때의 일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2월 말은 초봄이라기엔 겨울에 가까웠다. 거리는 서늘했고 하늘이 버석버석 메말라 있었다. 그날은 네가 시즌 개막을 앞두고 막바지 훈련을 위해 이 거리를 뜬 지도 열흘이 넘은 날이었다. 퇴근길에 전화를 받았다. 일본 본사에서 걸려온 국제전화였다. 쁘론또! 일본어 억양이 가득한 어색한 ...
달그락. 입 안에서 사탕이 어금니를 스치고 혀 위를 지나 다른 쪽 어금니에 닿는다. 다시 달그락. 사탕이 제법 큰 탓에 볼거리라도 하는 것처럼 뺨이 불룩하다. 밀크티맛 사탕이라며 받았지만 밀크티라기겐 처음 입에 넣었을 때 연하게 홍차향이 났을 뿐 연유를 들이부어 굳힌 것처럼 달기만 했다. 가만히 물고 있으려니 사탕이 닿은 점막이 얼얼할 정도라 어쩔 수 없이...
7 테시마는 꼬박 사흘을 일 없이 놀았다. 큰 프로젝트를 마치고 며칠 휴가를 받는 거야 흔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완전한 백수가 되어 놀아본 것은 가이딩 스쿨을 졸업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장무늬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입주할 때 도배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얼룩이 튄 자국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첫날의 일이었다. 두 번째 날에는 블라인드가 달려...
"테시마 선배, 저는 다시 태어나도 선배를 사랑할 거예요." 드물게 들은 사랑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놀란 눈을 하고 이쪽을 본다. 그러더니 먹지도 않고 케익을 찌르고만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테이블 위를 두드린다. 불안할 때면 늘 저런다. 그의 습관 하나하나를 다 기억할 만큼 우리는 오랜 시...
교토역 중앙출구에서 나와 히가시혼간지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서 고조역까지.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서 고조 거리를 그대로 따라 마츠바라 다리를 넘어 가모가와 강을 건넌다. 강변의 뒤로 돌아가 미야가와스지6초메로 향하면, 좁다란 길들이 몇 개가 모여 야사카 거리로 이어지는 그 틈새에서 언젠가부터 해가 지면 오렌지색 외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마사유메正夢(유비키리...
손가락 걸고 약속, 어기면 바늘 천 개 먹기! 아이의 자그마한 새끼손가락과 어른의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다. 동요를 따라 부르면서 문득 고작 이런 걸 어겼다고 왜 바늘을 천개나 먹이는 걸까, 그런 의문이 문득 들었다. 천 년을 살아도 알 수 없는 것은 아직 있는 법이다. 유비키리겐만(指切拳万) 真手 좌우로 잡목림이 길게 늘어선 좁다란 외길 끝에는 별다른 ...
태초에 언어가 있었다고 한다. 한데 언어도 없는 진흙땅을 짓밟고 들어와 발자국을 남긴 죄는, 언어가 없으니 영원히 단죄 받지 않는다. /미우라 시온, 비밀의 화원 때로 나는 가끔 너의 등에서 날개를 보곤 한다. 날개라는 것은 무언가의 은유다. 그것은 너의 신성(神性)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인간세에 쉬이 녹아들지 않는 너의 비인간적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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