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끄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찬 철문이 기대 있던 등을 민다. 열린 문 틈으로 내밀어진 고개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이 콘크리트 바닥을 딛는다. 테시마는 물고 있던 담배를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뺐다. 천천히 느리고 길게 숨을 내뱉는다. 입김을 닮은 하얀 연기가 흩뿌려지더니 이내 사라진다. 비켜주는 것처럼 엉덩...
노래를 할 수 없게 된 건 사형집행이었다. ―라고 마나미 산가쿠는 생각했다. 흔하게 쓰는 표현처럼 사형선고 같은 건 아니었다. 삶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 예고되어 있었기에, 스무해 전 첫울음을 내뱉음과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집행이었다. 유일하게 느낄 수 있던 생의 감각을 송두리째 뺏어 간, 집행. 말을 하려고 입...
신발장 문을 여는 순간 한 무더기의 조그만 박스들이 와르르 떨어지자 주변에서 와글와글 웃는 소리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함께 들렸다. 마나미는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여서 예쁘게 포장이 된 상자들을 주섬주섬 주워 들었다. 포장지 넘어 풍겨오는 달큰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한숨을 쉬면서 팔에 꿰고 있던 쇼핑백 속에 하나씩 담는다. 책상 위도, 서랍 안도, "마...
너를 처음 만난 이후 여름은 언제나 나에게 사랑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였다. 매앰매앰매앰 반복해서 짝을 찾아 우는 매미들의 시끄러운 울음소리에서도, 뜨거운 햇살을 막아내며 그림자를 드리우는 푸르고 무성한 나뭇잎 틈새에서도, 습기가 가득한 날 꾸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운동화 끝을 다 적시도록 차오르는 빗방울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을 떠올...
사랑에 빠지게 되는 데 이유가 있겠어?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어, 마키쨩. 내가 네게 사랑에 빠진 건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뜨고 때가 되면 여름이 돌아오는 것처럼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그게 왜일까 이유조차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필요하기도 하겠지. 그래, 너처럼 말야. 아침이 오는 건 지구...
'오늘 부활동은 미안한데 좀 빠질게.' 양해를 구하는 것인지 일방적인 통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마키시마의 말에 킨조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음', 이라고만 대답한다. 안된다는 말이 없으면 된다는 거겠지.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럼' 이라고 말하며 뒤돌아서려는데 킨조가 문득 물어온다. '하코가쿠야?' '아아, 뭐 그렇지.' 뭐든지 알고 있는 캡틴에게 가벼운 ...
너를 처음 본 것은 작년의 인터하이에서였다. 아니다, 더 이전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일 수도 있다. 아니 아직 만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만나는 날은 더 미래의 일일 수도 있었다. 너와 함께 올랐던 이로하 언덕에 내 시간이 고정된 이후, 어느 순간을 돌아봐도 네가 있어서 나는 도무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외로운 시간이 아...
아마도 그 시간은 꿈이었던 것처럼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내가 알던 나 혼자의 집만이 온전히 자리하고 있고 여전히 너는 내 곁에 없고 거울 속 나의 얼굴은 그 시절의 우리에게서 더 멀어져 있기만 하고 그저 오직, 내가 네게 주고 네가 다시 내게 주어 몇 번이고 우리 사이를 이어주던 손수건만이 손 안에 남아 있지 않아, 마치 우리의 운명이 꿈이 아니었...
"테시마 요원님, 어서 오세요. 아니, 이젠 팀장이 되셨다고 했나? 축하드리는 게 늦었네요." (철제 의자가 콘크리트 바닥에 끌리는 소리) "혼자 오시길 부탁드렸는데 올해는 손님이랑 같이 오셨네요?" "……우리 팀 신입이야. 네 케이스를 보고 인터뷰에 참여하고 싶다고 자원했어." "흐응, 전 허락한 적 없는데." "싫으면 지금이라도―" "아니에요, 그쪽 분...
"하지 마." "그, 그치만, 미도스지……!" "하지 말라고 했다." "그치만……!!" 미도스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탐탁찮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천천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다. 유연하게 구부러진 허리가 어느새 지면과 수평에 가까울 정도로까지 내려갔다. 양쪽 입꼬리를 광대에 닿을 정도로 끌어올리고 두 눈도 반달처럼 굽었지만 도통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
자고 일어났더니 왼손 새끼손가락에 무엇인가 매여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늘도 마나미가 손가락 끝에 빨간 실을 감아놓았을 것이다. 실 끝은 바로 옆에서 새근거리며 고른 숨을 내쉬는 마나미의 손가락 끝까지 뻗어서 그 곳에 감겨있겠지. 자신이 잠들면 기다렸다는 듯 마나미가 꼬물거리는 손으로 서로의 손가락에 붉은색 길을 이어놓기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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